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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이야기

장소와 기억

by 꿈꾸는몽당연필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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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피해 가는 삶은 없다."

허정도의 <도시의 얼굴들>의 첫 문장이다. 본 글에 앞서 '저자의 말'을 넣었다. 그 첫 문장인 것이다. 삶은 장소 없이 불가능하다. 장소는 삶을 담는 그릇이다. 삶은 기억으로 치환된다. 장소는 기억을 간직한다.

 

오래전 마산의 어느 시골 지역을 드라이브하며 지날 때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지는 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차에 오르고 도시를 벗어나 시골 풍경을 만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발견한 곳이 마산의 어느 시골이었다. 지명은 확실치 않으나 진동을 지나 곧바로 바닷길로 들어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이었다. 의도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다.

 

여름이었다. 짙은 녹음이 산과 들을 덮고 있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논을 보니 물빼기를 마치고 다시 물을 한가득 담아 이삭이 패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논에서 물은 두 번을 뺀다. 처음은 모를 심고 보름 정도 지나 뿌리가 어느 정도 내리면 처음으로 물 뺀다. 물을 빼야 뿌리가 빠르게 자라 땅을 파고든다. 모를 심고 물을 빼지 않으면 뿌리가 깊게 내리지 않는다. 그럼 여름 태풍에 쓰러지고 만다. 다시 물을 대어 가지치기를 하도록 눈다. 7월 중순경이 되면 다시 물을 빼 뿌리를 더 깊이 내리도록 만든다. 이것을 중간 물떼기라 부른다.

 

중간 물떼기가 끝나면 추수 전까지 물을 빼지 않고 계속 담아 둔다. 이때부터는 이삭이 피고, 곡식이 여물어 가면서 물을 가장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마치 임신하여 아이를 기르는 시기인 셈이다.

 

우리가 그곳을 찾았던 때는 이삭이 패는 출수기 때였다. 길에 잠깐 차를 세우고 논을 구경했다. 개구리도 보이고,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는 몰라도 피라미도 보였다. 개구리밥이 논을 절반쯤 덮은 것을 보니 물을 댄 지 보름은 지난 것 같지 않았다. 한 참을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문득 그곳이 궁금해 카카오맵으로 찾아 들어가니 논이 없다. 논이 밭이 되어 있었다. 너무 놀랬다. 왜 굳이 저길...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땅의 주인이 바뀐 건지, 주인의 마음이 바뀐 건지는 모르나 논은 사라지고 없었다. 

 

장소는 기억을 담는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은 왜곡되고 희미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변하는 세상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여분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경제적 논리에 의해 허름한 집들을 허물고 높은 빌딩을 짓는 곳이 많아진다. 새로움은 누군가의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세월이 흐르면 옛것은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일부의 간직할 것만을 남기고 말이다. 옛것이 아무리 좋아도 변하는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기억이란 것도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몫이다. 부모에게 아무리 소중한 물건도 자녀들에게는 버려야 할 쓰레기일 수도 있는 법이다. 모든 것을 간직할 수도 없는 법이다.

 

세월이 흐르고 환경은 변한다. 장소는 여전하나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진다. 변화에 따라 기억을 지우는 것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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